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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신, “아직 전성기는 끝나지 않았다”

작성자
handball
등록일
2008.02.09
조회수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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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신은 꿈을 이루기 위해 독일에 갔고 희망을 찾기 위해 국내 복귀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사진 한상무
\"독일 분데스리가 영웅 윤경신\" 기사에 이어

1월 3일 국내 실업팀 두산과 3년 계약을 맺었다.

함부르크SV가 기대와 달리 1년 계약을 제시해 국내 복귀를 결정하게 됐다. 2년 이상 계약을 제시했다면 아마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은퇴했을 거다. 11년 동안 뛰었던 굼머스바흐와 재계약에 실패했을 때부터 국내 복귀를 고려했다.

아내 권순균(34) 씨가 국내 복귀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내는 결혼 전 꽤 이름이 알려진 디자이너였다. 앙드레김 숍에서 일했는데 나와 결혼해 독일로 오면서 일을 그만뒀다. 프랑스 파리 등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왔지만 본인이 추구하는 디자인과 맞지 않아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나 때문에 8년 동안 자신의 꿈을 접은 아내에게 하루빨리 좋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12년 만의 국내 복귀다. 마음가짐이 특별할 텐데.

실력을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국내 핸드볼 인기를 높이는 데 힘쓸 생각이다. 독일에서 뛰며 홍보 전략 등에 대해 많이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하루빨리 국내에 적용하기 위해 대학원 과정을 밟을 계획이다. 두산 구단도 공부와 선수생활을 병행하겠다는 내 뜻을 받아들였다. 모교인 경희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갈 계획인데 시험이 11월에 있어 틈나는 대로 준비하고 있다.

핸드볼선수로서 적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책임감이 크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후배들에게 여러 면에서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12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계기는.

경희대학교 4학년 때 출전한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운 좋게 득점왕을 차지했다. 대회가 끝나고 굼머스바흐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분데스리가 진출이 목표였기 때문에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진출하기 전까지 분데스리가에서 뛴 동양인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홀로 객지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외롭고 두려웠다. 독일어를 하지 못해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다. 문화적 차이를 좁히는 것도 쉽지 않았고. 성격이 내성적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이제는 독일어를 곧잘 하는데.

독일에 처음 갔을 때 굼머스바흐 구단에서 한국인 통역을 붙여 줬다. 그런데 말을 빨리 배우려면 몸으로 부딪쳐야 할 것 같아 한 달이 채 안돼 통역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리그 적응도 그렇지만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업과 선수생활을 함께했나.

굼머스바흐에 입단할 때 퀼른대학교 체육학과에 입학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학교가 굼머스바흐에서 40km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체육학과에서 공부한다는 자부심으로 피곤한지도 모르고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언어의 벽에 부딪혀 수업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학업을 포기했다.

독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3년 정도 걸렸다. 영어와 독일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배운 것이라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동포분들께서 도와주신다고 많이 찾아오셨는데 모두 거절했다. 독일인과 부딪쳐야 빨리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수들에게 일부러 말을 많이 걸었다. 일반인들과도 자주 만났고. 그러다보니 언어는 물론 내성적인 성격까지 바뀌었다. 독일말을 배우면서 사귄 사람들이 12년간 독일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첫 시즌은 어땠나.

처음 6개월 동안은 고생을 많이 했다. 독일어를 모르는 데다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을 모르다보니 동료들과 손발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팀 스타일에 적응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감독의 작전 지시를 잘못 알아듣고 실책을 저지른 적도 꽤 있다.

독일과 국내 훈련 방식은 차이가 많았을 텐데.

스타일 자체가 다르다. 국내에서는 스파르타식으로 강도 높게 훈련하지만 독일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알아서 훈련한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프로선수들이라 훈련을 게을리 하지는 않는다. 이런 시스템은 유럽에서도 독일이 가장 잘 돼 있다. 유럽에서 프로리그가 있는 스페인, 프랑스보다 독일을 으뜸으로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국내에서 유럽식 훈련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흔히 유럽의 훈련을 과학적이라고 하고 국내는 스파르타식이라고 단정 짓곤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국내도 웨이트트레이닝 등 훈련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 유럽이 나은 점이 있다면 많은 자본이 투자되다보니 이런 체계가 더욱 효율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의료진이 선수 개인별로 붙어 있다. 또 하체, 상체 등 훈련 담당부서가 따로 있어 선수들이 컨디션을 조절하기 수월하다. 결국 리그 크기의 차이다. 훈련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나 실력 면에서는 국내선수들이 유럽선수들에게 뒤질 것이 하나도 없다.

국내선수들이 유럽의 벽을 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이라고 보나.

한국은 유럽보다 선수층도 얇고 선수들의 체격조건도 나쁘지만 지금까지 대등한 경기력을 보였다. 그러나 체력관리 면에서는 뮨제점을 드러냈다. 남녀 모두 유럽 나라들과 벌인 국제경기에서 전반전을 뒤진 적은 거의 없다. 체력만 보강한다면 세계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핸드볼이 강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인 특유의 손기술과 뛰어난 두뇌 회전 때문인 것 같다. 또 강도 높은 훈련을 하다 보니 유럽선수들보다 빠르게 경기를 이끌어 간다.

국내선수들의 해외 진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핸드볼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유럽 명문구단에서 뛰게 된다면 선진기술도 배워 올 수 있다. 선진기술을 국내 후배들에게 전파한다면 한국은 핸드볼 선진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뒤 한국선수들의 독일 진출에 힘쓴 걸로 알고 있다.

구단 직원들에게 한국선수들의 이야기를 자주 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최현호를 데려오기는 했다. 그런데 현호가 생각보다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구단에서도 적응기간을 오래 주지 않아 바로 덴마크리그로 옮기게 됐다. 구단이 조금만 더 지켜봤다면 분명히 분데스리가에서 좋은 선수가 됐을 텐데. 얼마 전 스위스리그 파디 빈터투에서 분데스리가 바링겐으로 이적한 조치호 선배는 꼭 잘 됐으면 좋겠다.

분데스리가에서 넣은 2,790골은 리그 통산 최다득점 기록인데.

동료들이 찬스를 잘 만들어 줬다.

그래도 비결이 있을 것 같은데.

12년 동안 한 번도 아프지 않고 뛴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거의 모든 경기에 나섰다. 이제는 나이도 먹고 체력이 떨어져 그렇게 뛰기는 힘들 것 같다(웃음).

한 번도 다치지 않고 뛸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꾸준히 웨이트트레이닝을 한 덕분이다. 다른 선수들보다 체력훈련을 배로 했다. 몸에 좋은 음식도 많이 먹었고. 부모님께서 보약을 자주 보내주셨다. 팀 동료들은 내가 보약을 먹을 때마다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나도 좀 줘 봐\"라고 해 막상 주면 먹지 못한다. 보약 색깔이 검지 않은가. 녹용과 개소주라고 설명하면 \"빨간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지 않느냐\"면서 믿질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한국의 잡초로 만든 거라고 대충 둘러댔다.

분데스리가에서 뛰며 친해진 동료가 있다면.

덴마크 출신의 얀 마코폭이다. 나이가 같은데 분데스리가 초기에 독일어를 배울 때 많은 도움을 줬다. 마코폭은 내가 아플 때 한국식으로 죽을 쑤어주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점에서 한국요리책을 사 죽 만드는 법을 터득한 것이었다. 솔직히 맛있지는 않았지만(웃음). 하지만 그 정성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유럽 사람들은 정이 없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런 친구가 있어 분데스리가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핸드볼선수 외에도 많은 이들과 사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마리오 팔켐베악이 대표적이다. 팔켐베악은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을 때 신문기사를 읽고 굼머스바흐 구단에 연락해 무보수로 가정교사가 돼 준 친구다. 처음에는 구단에서 그 친구를 의심해 구단주까지 나서서 가정교사를 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는데 오해가 풀려 인연을 맺게 됐다. 팔켐베악은 나중에 굼머스바흐 구단 직원으로 채용됐다. 지난해 함부르크SV로 이적해 지리적으로 많이 멀어졌는데 승용차로 6시간이나 달려 내 경기를 꼬박꼬박 보러 왔다. 33개월 된 아들 재준이가 나보다 이 친구를 더 좋아할 정도다.

국내 언론에서는 독일 축구 분데스리가 1호인 차범근과 당신을 자주 비교하는데.

독일에서 핸드볼로 성공했다지만 축구에 비할 바가 되겠는가. 축구는 세계적인 스포츠다. 차범근 선배와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이다. 솔직히 처음 독일에 갔을 때 현지인들과 친해지려고 차범근 선배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낯선 땅에서 공통된 화젯거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렇게 말문이 트이면 나중에는 그 친구들이 먼저 내게 다가와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핸드볼 인기는 어느 정도인가.

어린이들이 길거리에서 하는 운동이 축구, 농구, 핸드볼이라면 설명이 될 것 같다. 유소년팀과 실업팀, 프로팀을 모두 합치면 3천 개가 넘는다. 관중들 가운데 나이 많은 팬들은 거의 심판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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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신은 한국핸드볼을 세계 무대에 알린 1등 공신이다.
사진 한상무
지난해 벌어진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녀 핸드볼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있었던 편파 판정에 대해 독일에서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던데.

TV에 자료 화면이 많이 나왔다. 대회를 끝내고 독일로 돌아가자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함부르크SV 팀 동료에게도 많은 말을 들었을 것 같다.

쿠웨이트전에서 8골 차로 지지 않았는가. 팀동료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웃었다. 국제핸드볼연맹(IHF)이 쿠웨이트전에서 오심이 38차례나 있었다고 발표하자 팀동료들이 \"사실이냐\"며 나보다 더 흥분했다. \"이런 경기에 왜 뛰러 갔냐\"며 면박을 주는 선수도 있었다. 어떤 선수는 \"아시아는 도대체 왜 그러냐\"라는 말까지 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말했겠는가.

뭐라고 했나.

\"이겼으면 쿠웨이트 왕자가 우리나라에 석유를 주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경기 내내 불안했다\"고 말했다(웃음). 그랬더니 동료선수들이 \"대세는 아랍\"이라며 나를 달랬다. 동료선수들이 한국의 핸드볼 실력을 인정하는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2006년 도하아시아경기대회에 이어 연이은 편파 판정인데.

도하아시아경기대회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핸드볼 경기의 특성으로 볼 때 오심이 몇 차례 나올 수는 있다. 심판도 사람이니까. 그러나 지난해 아시아지역예선은 일반인이 봐도 \"이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했다.

당시 기분이 어땠나.

허탈했다. 팀동료들 모두 그랬다. 힘이 빠져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재경기를 하게 돼 정말 다행이다. 사실 이번에 국가대표팀에 합류하는 게 쉽지 않았다. 구단에서는 \"편파 판정이 불을 보듯 뻔한 경기에 왜 또 가느냐. 가서 괜히 스트레스 받는 것 아니냐\"며 독일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이번에는 편파 판정이 절대 없을 거라고 설득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랜 객지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골프를 자주 치는 편이다. 또 운동을 마치면 사우나에서 몸과 마음을 푼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들 재준이의 얼굴을 보면 스트레스가 싹 풀린다.

아이 울음소리 등으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지 않나.

처해진 상황이 다르다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정규시즌 경기 외에 번외경기도 많고 합숙훈련도 자주 있다 보니 아이를 자주 보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오랜만에 보는 아이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어렵게 낳아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재경기를 앞두고 있는데.

대표팀 내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다. 어린 선수들과 15살 이상 차이가 나다보니 책임감을 많이 느낀다. 사실 언론 보도에 많이 서운하다. 편파 판정이 있어도 일주일 정도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해진다. 편파 판정에 의한 패배는 선수들에게 단순히 패배가 아니다. 비인기종목 선수들이기에 마음의 상처는 더 크다.

핸드볼을 하면서 후회한 적이 있나.

힘들었던 적은 있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핸드볼을 하면서 다른 종목에서 영입 제의가 많았다. 키가 커서 그런지 농구 쪽 제의가 가장 많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종목을 바꾸면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아 한 우물만 파기로 했다. 독일에 진출하기 전에는 친구들에게 \"왜 농구를 안 하고 핸드볼을 했냐\"는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말하는 친구가 없다.

농구실력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대학 시절 다른 대학 동아리팀과 경기를 해 진 적이 없다. 패스 능력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나야 키 덕을 많이 봤지만(웃음).

핸드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서울숭덕초등학교 4학년 때 특별활동부에서 처음 핸드볼공을 잡았다. 축구공보다 작은 핸드볼공이 신기해 핸드볼부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께서도 내가 운동하기를 바라셨다. 몸이 약하고 내성적이라 그랬던 것 같다. 중학교 때까지는 핸드볼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키가 부쩍 크면서 핸드볼에 재미를 붙였다.

어렸을 때 몸이 아팠나.

아픈 건 아니고 굉장히 말랐다. 또래에 비해 키만 컸다. 아버지가 183cm이고 어머니는 170cm로 두 분 다 키가 크다. 핸드볼선수 출신인 어머니에게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것 같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육상을 하셨다고 하는 데 취미로 하신 것 같다(웃음).

비인기종목인 데다 진로도 마땅치 않아 핸드볼을 그만 두고 싶을 때도 많았을 것 같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힘들어 뛰쳐나오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버티다 여기까지 오게 됐다. 중학교 때 함께 핸드볼을 한 친구 7명 가운데 끝까지 핸드볼을 한 사람은 나 하나 뿐이다.

그 친구들과 연락은 자주 하나.

외국에서 살다보니 그러지 못했다. 몇몇 연락을 하는 친구가 있긴 하지만 만난 지 꽤 오래 됐다. 한 시즌을 마치면 6월이나 7월에 한국에 와 3,4주 정도 머물렀다. 가족 여행을 다니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잠시 짬을 내 은사를 찾아뵙고 술을 마시는 게 국내에 머물 때 한 일의 거의 전부다.

주량은 어느 정도인가.

술자리에서 먼저 취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몸이 길어서 알코올을 흡수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걸리는 것 같다(웃음). 독일에서는 가끔 맥주 한 잔을 마실 뿐인데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술을 퍼마시게 된다. 독일에서는 저녁에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다. 특히 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마약을 하거나 술 취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무섭다.

선수생활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두산과 3년 계약을 맺었는데 계약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대학원 과정도 마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박사 학위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그 일이 여의치 않으면 독일로 가 지도자 자격증을 딸 생각이다. 지도자로 코트에 서는 게 현재로서는 최대 목표다. 물론 일단은 선수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국내무대 복귀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도 들었고 경기력도 예전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피로회복 속도도 이전보다 많이 느려졌다. 이런 점들을 만회하기 위해 젊은 선수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하겠다. 아직 내 전성기는 끝나지 않았다.

SPORTS2.0 제 88호(발행일 1월 28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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