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기고] 선수에서 한 가정의 아내로, 후회 없는 마지막과 새로운 시작을 말하다

작성자
Handballkorea
등록일
2016.01.05
조회수
630
첨부

 

2014 핸드볼코리아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슛을 시도하는 문필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낸 그때의 멤버들이 하나, 둘 코트를 떠나고, 이제 코트 위에 남은 우생순 멤버는 몇 명 없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우생순 멤버가 은퇴를 선언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당시 대표팀의 막내였던 문필희가 결혼과 함께 22년 간 정들었던 코트를 떠나게 됐다. 우생순 신화의 막내로서 기라성 같은 언니들을 보고 배우며 오랜 시간 태극마크를 달고 한국여자핸드볼을 위해 뛰었던 문필희가 이제는 한 남자의 아내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뛰어놀기 좋아했던 왈가닥 소녀 문필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작은 손으로 핸드볼을 잡았다. 그녀는 그때부터 핸드볼 선수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한 길만을 고집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고 주니어대표로 발탁돼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한국체대 1학년 시절 2001년 세계여자선수권대회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유망주 문필희의 실업무대 입성은 큰 이슈였다. 당시 효명건설이 새롭게 창단하면서 임영철 감독을 사령탑으로 이상은과 오영란, 명복희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문필희는 많은 팀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모두 뿌리치고 임영철 감독의 지도를 받기 위해 효명건설에 입단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임영철 감독과 기라성 같은 선배들 밑에서 배우고 싶다는 당찬 각오를 안고 효명건설에 입단한 문필희. 예전이나 지금이나 롤모델로 삼는 선수는 없지만 코트 위에서 선배 언니들의 장점을 골고루 배우려 노력했다. “이상은, 한선희, 오영란, 명복희 등 대단한 언니들과 대표팀부터 실업팀까지 같이 생활을 했다. 같이 지낸 적이 있어서인지 실업팀 생활은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도 제가 제일 어리다보니 대표로 많이 혼나기도 했다. (웃음) 언니들 밑에서 노련미와 성숙함을 배웠다. 코트 안에서는 감독님보다 언니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이 때문에 그런 부분을 듣고 배웠던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기라성 같은 언니들이라도 훈련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런 부분을 보고 많이 느꼈고 저런 선수 혹은 그 이상이 되겠다고 목표를 잡았던 것 같다” 

 

데뷔 후 문필희는 줄곧 인천에서 뛰었다. 그리고 효명건설부터 벽산건설 그리고 인천시청까지 임영철 감독의 애제자로 남았다. 약 20년 전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됐다. 임영철 감독이 충남 종근당의 감독을 지냈을 당시 문필희는 천안여중에 재학 중이었다. 그때부터 임영철 감독은 문필희를 눈여겨봤다. 같은 지역 팀이었기 때문에 문필희가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2004년 대학생 신분으로 아테네올림픽을 준비하며 임영철 감독과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고 효명건설과 벽산건설, 인천시청까지 한 배를 탔다. 문필희는 임영철 감독에 대해 딱 잘라 설명하지 못 했다. “정말 (감독님의) 훈련은 힘들다. 그러나 좋은 지도력, 리더쉽, 통솔력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그동안 좋은 성적을 내셨다고 본다. 당연히 운동할 때는 긴장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 강하게 하는 부분이 있으시지만 사생활면에서는 정말 잘해주신다”고 제자만이 알고 있는 임영철 감독에 대해 설명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핸드볼의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아있다. 덴마크와 두 차례 연장접전 끝에 눈물의 은메달을 따냈던 여자대표팀. 그 당시 이야기는 훗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며 핸드볼을 대중에게 알리는 기회가 됐다. 이른바 우생순 멤버로 불리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선수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핸드볼을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문필희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대표팀 막내로 많은 시간을 출전하진 않았지만 그때 경험이 바탕이 되어 지금의 문필희를 만들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하지만 문필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따로 있었다. 우생순 신화를 있게 했던 2003년 크로아티아세계선수권대회가 문필희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2003년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처음으로 올림픽티켓을 못 땄다. 그때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죄송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올림픽 티켓이 더 절실했다” 

 

2003년 아시아지역예선 통과 실패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진출은 불투명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그 충격은 더 컸다. 다행히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었다. 올림픽 최종예선 격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위 이상의 성적을 거둬 올림픽 진출의 마지막 기회를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선선수권대회는 올림픽보다 성적을 내기 어려운 대회다. 올림픽보다 더 많은 유럽국이 출전하기 때문이다. 여자대표팀의 올림픽 출전은 힘들어보였다. 그러나 위기에 더 강해지는 것이 한국여자핸드볼 아닌가. 유럽 강호들을 물리치고 최종 3위에 오른 여자대표팀은 극적으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진출권을 따냈다. “티켓을 확보했을 때 정말 기뻤고, 안도했다. 마음 속 미안함이 사라졌던 것 같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정말 쉽지 않은 대회인데 절실함이 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핸드볼선수 출신 이순성 씨와 문필희의 웨딩사진

 

그때의 힘들었던 시간을 이겨낸 덕분일까. 문필희는 이후로도10년 넘게 대표팀을 지켰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까지 굵직굵직한 대회에 출전하며 막내가 아닌 한국여자핸드볼의 대들보 역할을 해냈다. 언니들만큼 해낼 수 있을까란 부담감도 있었지만 긴 시간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팀과 소속팀을 지켰다. 2015년, 문필희는 주장으로 인천시청의 2년 연속 우승도 이끌었다.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그때의 언니들처럼 노련하게 후배들과 우승을 일궈냈다. 34세, 은퇴를 생각할 수 있는 나이지만 그녀의 실력만큼은 은퇴를 거론하기 이른 감이 있다. 주변에서도 그녀의 은퇴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녀는 후회 없이 떠나고싶었다. “몸 상태도 썩 좋지 않고 부상도 많았다. 결혼까지 하게되면서 복합적인 이유로 코트를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며 “아직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도자로서) 서서히 준비를 할 생각이다”라고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대한핸드볼협회 윤초화 객원기자]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