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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아직 오지 않았다

작성자
Handballkorea
등록일
2016.07.02
조회수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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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석 기자의 觸(촉)] 올림픽 金에 세번째 도전하는 임영철 女핸드볼 대표팀 감독


"올림픽은 전쟁… 금메달 같은 은메달이라는 건 없다"


 

지난 27일 서울 태릉선수촌 핸드볼 훈련장이 있는 필승관. 오후 3시 30분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 임영철(57) 감독이 나타났다. 짧게 깎은 머리, 등에 ''KOREA''라고 적힌 티셔츠와 검은색 하의 운동복은 2004년과 2008년 올림픽 핸드볼 중계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코트 위에서 몸을 풀고 있던 선수들과 코치진이 그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집합했다. 임 감독이 "국기에 대하여 경례" 하고 외치자 다들 태극기를 향해 서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임 감독이 "바로"라고 한 뒤 "훈련 시작"이라고 외쳤다. 임 감독은 이어 코트 한쪽 감독석에 앉아 선수들 훈련 장면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뭐가 궁금합니까?" 인터뷰가 시작됐다.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 임영철(57) 감독이 서울 태릉선수촌 필승관에서 선수들의 훈련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오는 8월 리우올림픽은 임 감독이 감독으로 세 번째 출전하는 올림픽이다. 2004년 아테네와 2008년 베이징에서 각각 은메달, 동메달을 따낸 임 감독은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 목에 꼭 금메달을 걸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 이진한 기자


금메달 같은 은메달은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항상 합니까.


"훈련 시작과 끝에 항상 합니다."


―왜 합니까.


"우리가 대한민국 국가대표라는 사실을, 가슴에 달고 있는 태극마크의 소중함을 언제나 잊지 말라고 합니다."


―선수들에게 애국심을 주제로 리포트도 쓰게 하지요.


"경기를 마쳤을 때나 다른 나라 경기를 본 뒤 자필로 리포트를 쓰게 하는데, 가끔 팀워크나 국가대표에 대해서도 쓰라고 합니다. 너희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뭘 해야 하는지 써내라고 한 적이 있는데 대부분 핸드볼로 메달을 따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표팀 미래가 밝습니다."


임 감독은 지난 2013년 4월부터 대표팀 전임 감독이 됐다. 임기는 올해 10월까지다. 그가 이끄는 대표팀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일본을 꺾고 금메달을 땄다. 작년 10월 일본에서 열린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선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해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한국 여자 핸드볼의 9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이 확정된 경기였다.


임 감독은 오는 8월 리우올림픽을 포함해 감독으로만 올림픽에 세 번째 출전한다. 우리나라 구기 종목 사상 유례없는 기록이다. 그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각각 은메달, 동메달을 일궈냈다. 2004년 그가 이끈 대표팀은 덴마크와의 결승전에서 두 번의 연장전과 승부던지기 끝에 아쉽게 패했다. 이 스토리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이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에게 우생순 얘기를 꺼냈더니 ''우생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는 표정으로 기자를 쳐다봤다.


"올림픽은 전쟁입니다. 싸움입니다. 총칼만 없고 사람 죽이지 않을 뿐이지. 나는 금메달 같은 은메달, 투혼과 감동의 은메달이라는 말 아주 싫어합니다. 금메달은 금메달이고, 은메달은 은메달입니다."


임 감독과 얘기하면서 10분이 지났다. 선수들은 2개 조로 나뉘어 코트 양끝을 수차례 왕복달리기 한 뒤 팔굽혀펴기를 하는 체력훈련을 하고 있었다.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체육관에 퍼졌다.


선수들은 고강도 훈련을 오전 6~7시, 오전 10시~낮 12시 20분, 오후 3시 30분~7시 매일 반복한다. 임 감독은 "훈련 강도의 최대치를 100이라고 봤을 때, 지금은 60 정도 수준"이라며 "서서히 100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훈련이 가혹하다고 하던데요.


"그런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나는 올림픽을 목표로 스케줄을 짜 놓고 계획대로 훈련을 시킵니다. 나 스스로 약해져서 이걸 애들이 견뎌낼까 이런 생각 하면 실패합니다. 내가 나약해지면 선수들은 더 나약해집니다."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이 2008년 8월 23일 베이징올림픽체육관에서 열린 3·4위전에서 헝가리 팀을 꺾은 뒤 임영철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임 감독은 이날 경기에서 종료 1분을 남겨 놓고 은퇴를 앞둔 선수들을 뛰게 했다. 임 감독은 “선수들의 가족이 ‘우리 딸 핸드볼 시키길 잘했다’고 뿌듯해하길 바랐다”고 했다. / 조선일보 DB


30분 훈련 뒤 10분 휴식. 이후 다시 훈련에 들어갔다. 선수들은 코치들 수신호에 따라 전진하고 후퇴하고 공격하고 방어했다. 군대 훈련 같았다. 임 감독이 "어이" 하자 선수들 동작이 빨라졌다. "야!" 하자 더 빨라졌다.


필승관 한쪽 벽에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여자 핸드볼팀 파이팅!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현하는 데 해병대가 함께합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선수들은 지난 3월 28일부터 4박5일간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았다. 임 감독 아이디어였다. 훈련에 참여했던 해병대 교관은 "임 감독이 해병대원이 받는 것과 똑같은 훈련을 시켜달라고 부탁했었다"고 말했다.


해병대 훈련에서 여자 선수 전원이 30m 높이에서 레펠을 타고 내려왔다. 6명씩 조를 이뤄 120㎏ 무게의 고무보트를 머리로만 이고 수온 8도의 바다에 가슴 깊이까지 들어갔다. 기관총 실탄이 날아다니고 실제 TNT 폭탄이 터지는 훈련장을 낮은 포복으로 기었다. 무박 2일간 군장을 메고 30㎞를 이동하는 천자봉 행군도 완주했다.


―이런 훈련이 아직도 필요합니까.


"정신무장과 협동심, 체력을 기르기 위해 필요합니다."


―정신력은 한국의 전통적 강점 아닙니까.


"정신력을 더 키워야 합니다. 한국 여자 핸드볼은 1984년 LA올림픽을 시작으로 이번이 9번째 올림픽 출전인데,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이번 대표팀 구성이 가장 약합니다. 선수들도 그걸 잘 압니다. 약하다는 걸 아니까 하고자 하는 의욕이 더 있고 정신력을 더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실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까.


"정신력도 실력입니다. 한국 대표팀의 강점인 패스와 스피드는 이미 외국에 다 알려졌습니다. 유럽팀들은 이를 배워서 자신들의 파워 핸드볼에 접목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새로운 수비와 공격 전술을 보여주겠지만 그 이전에 정신력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정신력입니까.


"집중력입니다. 나는 운동하는 시간만큼은 빈틈을 안 줍니다. 집중력 높은 훈련이 실책 없는 경기로 이어집니다. 오늘 얼마나 충실하게 훈련하느냐에 따라서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습니다. 오늘 피곤하다고 쉬면, 내일 또 피곤하면 어쩌겠습니까? 또 쉽니까?"


―선수들이 훈련에 늦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일 한 번도 없었습니다. 1분도 늦은 적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나는 보통 훈련 30분 전에 먼저 나옵니다. 제가 감독이 됐다고 발표되는 순간, 선수들은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저 감독한테는 변명이 안 통한다.''"


"그래도 만약에 늦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임 감독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핸드볼은 단체 경기입니다. 한 선수가 늦잠을 자서 아침 훈련에 늦었다면 안 깨우고 나온 동료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함께 싸우는 동료에게 관심이 없다는 얘기니까."


‘우생순’ 결승전 다시 본 적 없어


한국 여자 핸드볼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데 실패한 이후 침체기를 겪었다. 대한핸드볼협회는 이런 상황에서 임 감독에게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다. 당시 임 감독은 인천시청 감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 자리를 관두고 ‘메달 따면 본전, 못 따면 역적’이 되는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총 12개 국가가 출전하는 리우올림픽 여자 핸드볼에서 한국은 세계 랭킹(10위)만 따지면 중위권으로 분류된다. “왜 대표팀에 다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은메달, 동메달을 땄으니 이제 금메달을 따고 싶다.”


임 감독은 2003년 11월 처음으로 대표팀 감독이 됐다. 당시 대표팀은 아테네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상황이었다. 올림픽 본선에 나가려면 바로 그다음 달 열리는 세계 여자 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 무조건 5위 안에 들어야 했다. 임 감독은 이 대회에서 유럽 강호들을 잇달아 격파하고 3위에 올랐다. 대표팀은 이듬해 8월 열린 아테네올림픽에서 결승전에 진출해 은메달을 땄다. ‘우생순 신화’였다. 정작 임 감독은 “덴마크와 벌인 결승전 경기를 다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왜 안 봅니까.


“진짜 보기 싫습니다.”


―왜 싫습니까.


“마땅히 우리 선수들 목에 걸렸어야 할 금메달을 뺏겨서 그렇습니다. 당시 우리 선수들은 올림픽에 모든 걸 걸었습니다. 유럽에서 뛰고 있던 선수들은 대표팀에 선발되느라 소속팀과 재계약도 못 했습니다. 국가를 위해 개인을 버린 겁니다. 그런데 금메달을 못 땄습니다.”


―편파 판정 때문에 졌다는 얘기도 많았죠.


“잔칫상을 차렸는데 얼토당토않은 놈이 와서 다 먹어버리고 가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한국 여자 대표팀이 그랬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세계는 아시아 변방의 국가가 기적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또 금메달에 도전하니 얘기가 달라집디다.”


―한국팀이 국제대회에 나갈 때마다 오심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심판 판정은 국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됐든 그런 부분도 경기력으로 받아들이고 이겨내야 합니다.” 2004년 결승전이 끝난 직후 임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오늘 덴마크에 진 것은 기술과 체력 때문이 아니다. 핸드볼에 대한 덴마크 국민의 높은 관심에 밀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짝 핸드볼 열기에 실망한 적 많았죠.


“이제는 화나고 그런 거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이 고생한 만큼 대우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유럽에서 한 구기 종목이 올림픽 금메달 둘, 은메달 셋, 동메달 하나 정도를 따면 그 종목 선수들은 영웅이 됩니다. 부와 명예를 다 갖습니다. 우리나라는 안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금메달을 따야 합니다. 우리 선수들이 흘린 땀만큼 보상을 받으려면 금메달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독사’는 선수를 버리지 않는다


임 감독이 갑자기 버럭 했다. 한 수비 선수가 공격 선수에게 번번이 뚫려서였다. “이겨내야 해. 이걸 견뎌내지 못하면 네 실력은 제자리에 맴돌아. 이대로 주저앉을래?”


선수들 사이에서 임 감독 별명은 ‘독사’였다. 최고참 오영란(44) 선수부터 막내 유소정(20) 선수까지 모두 “감독님이 무섭다”고 했다. 한 선수는 “감독님이 다가와도 무섭고 말을 해도 무섭고 바라만 봐도 무섭고 그냥 다 무섭다”고 했다. 선수들은 “그래도 우리는 감독님을 믿는다”고 했다. 오영란은 “임 감독님께선 자기 선수를 버린 적이 없다. 그걸 우리 모두가 안다”고 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 핸드볼 3·4위전. 한국은 종료 1분을 남겨 놓고 헝가리에 5점 차로 앞서고 있었다. 임 감독은 작전 타임을 부른 뒤 벤치에 앉아 있던 노장 선수들을 코트에 서게 했다. 은퇴를 앞둔 선수들에 대한 배려였다. 이는 ‘언니들의 졸업식’이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됐다. “그때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선수들의 부모와 가족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딸 핸드볼 시키길 잘했다고 뿌듯해할 것 아닙니까?”


임 감독은 5남매 중 막내였다. 부친은 세무 공무원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육군사관학교에 가기를 원했지만, 아들은 1973년 서울 연희중 1학년 때 스승의 권유로 핸드볼을 시작했다. 아버지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임 감독은 중학교 3학년 때 전국체전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지만 아버지한테 혼날까 봐 트로피를 감췄다. 그가 고대 사대부고에 입학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아들의 선택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임 감독의 부친은 2008년 7월 베이징올림픽을 보름 앞두고 별세했다. 임 감독은 태릉에서 대표팀 훈련을 하느라 임종을 할 수 없었다. “그 3년 뒤에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치매로 7년간 고생하셨는데,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치매가 더 악화됐습니다.”


―1986년 결혼했지요.


“아내는 같은 대학(원광대) 무용학과에 다녔습니다. 결혼 후 무용을 포기하고 내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아내가 고생 많이 했습니다. 집안에 잘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임 감독은 1984년 LA올림픽에 남자 국가대표로 나갔지만 메달을 따진 못했다. 1994년 종근당 감독을 맡으면서 여자팀을 이끌기 시작했다. 1998년 IMF 사태로 종근당 팀이 해체되자 그는 실업자가 됐고 가족 모두 처가가 있던 전주로 갔다. 임 감독의 아내가 옷가게를 하면서 가족 생계를 책임졌다. 그는 처남과 제지 도매업을 하면서 “핸드볼은 쳐다도 안 보겠다”고 했지만, 다시 핸드볼로 돌아왔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여자 핸드볼 대표팀 코치로 활동한 이후 2001년부터 약 1년 동안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한 여자 핸드볼팀 감독을 지내기도 했다.


임영철 감독이 지난 3월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단에서 목봉(木棒) 훈련을 받고 있는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 대한핸드볼협회


―어떻게 가게 됐습니까.


“그쪽에서 제의가 왔습니다. 한국인이 핸드볼 감독으로 유럽에 진출한 적이 없었으니까 공부가 많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통역은요.


“없었습니다. 한·영사전, 영·세르비아어 사전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해결했습니다. 하면 됩니다.”


―성적은 어땠습니까.


“유럽 챔피언스컵 준결승에서 슬로베니아 팀한테 골득실에 밀려서 결승 못 올라갔습니다.”


―왜 1년 만에 돌아왔습니까.


“몬테네그로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정세가 정말 불안했습니다. 팀에선 5년 계약을 하자면서 한국 선수와 코치도 데려오라고 했는데 온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은 金 따는 날


임 감독은 이번 여자 핸드볼 대표팀 최종 14인 명단에 오영란(44)·우선희(38) 선수를 포함시켰다. 오영란은 이번이 다섯 번째 올림픽 출전으로, 두 딸(11·7세)을 뒀다. 최근 출산한 우선희는 세 번째 출전이다.


―체력적으로 문제가 안 될까요.


“문제 있습니다만 두 선수가 필요합니다. 이번 대표팀에는 어린 선수가 많은데, 그러다 보니 팀의 구심점이 없습니다. 팀이 위기에 빠졌을 때 코트 위에서 중심을 잡아 줄 겁니다.”


―처음에는 모두 고사했다는데.


“무엇보다 주위의 편견 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 ‘저 나이 먹고 또 해? 후배들한테 길을 터줘야지’ 이런 얘기 많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따끔하게 한마디 했습니다. 너희가 안 들어오고 다른 선수가 들어와도 똑같이 욕먹는다. 기왕이면 잘해서 좋은 쪽으로 승화시키면 좋지 않으냐고.”


―효과가 있습니까.


“팀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후배들이 보고 배울 선배가 없으면 성장을 못 합니다. 스포츠는 패기만 갖고 안 됩니다. 경험, 연륜, 노련미도 필요합니다. 군대에서 왜 한 소대에 다양한 계급을 넣겠습니까?” 그는 질문이 계속되자 “훈련하는 데 방해 안 하겠다고 해서 인터뷰 허락했는데…”라고 했다.


―감독님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아직 안 왔습니다.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면 그게 나에게도 생애 최고의 순간일 겁니다. 이제 다 됐습니까?”


인터뷰가 끝났다. 임 감독은 훈련일지를 쓰느라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전현석 기자 winw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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