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72주년을 맞은 대한핸드볼협회는 그간 국내 핸드볼 저변 확대와 함께 대한민국 핸드볼의 부흥을 이끄는 행정의 중심이자 숨은 조력자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 핸드볼은 1980년대 이후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명실공히 핸드볼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유창히 전(前) 사무국장은 1962년부터 1993년까지 총 31년 동안 대한핸드볼협회에서 사무국장을 역임, 총 10명의 협회장을 모시며 국내에 핸드볼 문화를 확산시키고 발전시키는데 앞장섰다. 지금 모습의 핸드볼이 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힘써온 유창희 초대 사무국장을 만나 대한핸드볼협회 사무국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척박한 환경에서 대한민국 핸드볼의 기틀을 다지다
“협회가 처음 시작할 때는 간판 하나 없이 등록서류, 나일론으로 만든 심판복이 담긴 박스 하나가 전부였다. 심지어 심판복은 개인용이 아닌 공용으로 다른 사람이 입다가 벗어 놓아 얼룩이 묻은 옷을 다시 입어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유창희 대한핸드볼협회 초대 사무국장은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이와 같은 소회를 밝혔다.
1950년대 말 체육사를 빌려 협회의 기틀을 다질 당시에는 사무국이라는 명칭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협회 사무실 역시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다른 협회 사무실과 같이 사용하는 수준에서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임원들 역시 대부분 학교선생님으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으나 봉사 정신으로 협회 업무를 맡아 진행했다. 여유롭지 못한 재정 탓에 초기에는 팀 별로 별도 등록비를 받았고, 직접 발로 뛰며 모은 후원금으로 협회 운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일례로 대한핸드볼협회 최초의 기록지인 1호 회보는 단어 그대로 유창희 전(前) 사무국장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당시 먹지에 한 자 한 자 글씨를 써서 손수 제작했기 때문이다. 선수나 팀에게 주어지던 대회 상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뿐아니라 선수들이 해외 원정을 갈 때는 검은 가방에 흰색 페인트를 구입해 손수 ‘KOREA’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고, 1985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당시에는 기념품까지 직접 제작해야 했다.
오늘날에는 초등학교팀부터 실업팀까지 모두 포함해 약 160개의 핸드볼 팀이 운영되고 있지만, 사무국이 설립될 그 즈음 등록 팀은 40여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당시 형편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또, 각 학교마다 핸드볼 스타가 있었고 농구나 축구뿐만 아니라 핸드볼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 핸드볼은 역대 협회장들의 지원을 계기로 조금씩 발전해왔다.
오정익 회장의 경우 국내 최초로 제대로 된 남녀 국가대표팀 합숙 훈련을 시작하며 국제교류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981년 김종하 회장 취임 후에는 외형적으로 보다 성장했다. 당시 김종하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토대로 우리나라는 1980년대 각종 세계대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며 대한민국 핸드볼 황금기를 맞았다.
핸드볼, 지금의 모습을 갖추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핸드볼의 모습은 팀 당 7명의 선수가 경기를 뛰는 7인제의 모습이지만, 초창기 핸드볼 경기장 위에는 11명의 선수가 하나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렀다. 핸드볼만 하는 선수가 없었고 한 명의 선수가 축구나 농구 등 여러 스포츠 종목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의 7인제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은 1963년에 들어서다. 7인제가 도입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제적인 교류가 한 몫 했다. 우리나라 핸드볼 최초의 국제교류는 1961년 일본 남자대학팀 초청에서 시작된다. 이 당시 한시적으로 11인제와 7인제를 병행하며 시범경기를 운영하는 과정을 거쳐 2년 후 완벽히 7인제로 자리잡게 됐다.
핸드볼은 전용 실내 경기장을 갖춘 대표적인 스포츠 종목 중 하나지만 초창기에는 여건이 녹록하지 않았다. 핸드볼이 처음 시행될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실외에서 경기가 열렸다. 전용체육관이 없었던 당시에는 배구장 또는 정구장을 협조해 경기를 진행해야했다. 그마저도 갑작스럽게 비가 내릴 경우, 고인 빗물 때문에 경기장이 미끄러워서 경기를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웠다. 선수들이 경기 중 땀을 흘릴 경우, 부상 위험 등의 이유로 땀을 닦기 위해 잠시 경기를 중단하는 지금으로서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는 경기당 10골만 나와도 많은 득점을 기록한 경기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실내에서 핸드볼 경기를 진행한 것은 1979년 대전에서 개최된 제60회 전국체전이었다. 당시 배순학 대한체육회 운영부장의 노력에 힘입어 주경기장인 충무체육관에서 농구나 배구 등 다른 실내 구기종목을 제치고 핸드볼 경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핸드볼이 실내경기로 전환된 이 때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핸드볼은 기능이나 운영 여건에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핸드볼협회는 창립 이후 지금까지 대한체육회로부터 대표적 모범단체로 꼽히고 있다. 그 배경에는 지난 세월 동안 ‘본인의 일에 충실해야 하며, 자기 일을 남에게 미루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해온 유창희 전(前) 사무국장과 같은 핸드볼 선배들의 숨은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은 힘이 아니라 불굴의 노력이다’라는 사무엘 존슨의 말처럼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한데 뜻을 모아 대한민국 핸드볼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다.
(본 내용은 고병훈 경기력향상위원회 위원장과 유창희 전 사무국장과의 대담을 재구성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