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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 역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핸드볼 국가대표의 첫 시작

작성자
Handballkorea
등록일
2017.05.03
조회수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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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남녀국가대표팀은 아시아 맹주로서 아시아에서만큼은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다. 아시안게임에서 남자핸드볼은 1986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5연패를 이루는 등 금메달 6개와 은메달 1개를 따냈고, 여자핸드볼은 1990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5연패와 함께 금메달 6개, 동메달 1개를 수확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남녀국가대표팀 모두 국제무대에서 주춤하고 있다. 특히 남자핸드볼은 중동세에 밀려 아시아에서도 한 단계 뒤처진 상태다. 이런 상황을 볼 때면 누구보다 안타까운 것이 김창현 前 광주교육대학교 총장이다.

 

 

국가대표의 첫 출발, 시작은 이랬다

 

김 총장은 엘리트 선수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을 하지 않았고, 우연히 체육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는데 핸드볼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다 1963년도 핸드볼 선수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처음 코트로 나서게 된 상황이 조금은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웠다. “당시 처음으로 대학선발팀(이때까지는 국가대표팀 자체가 없었음)으로 일본 원정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종별선수권대회 일정이 잡혀 있었다. 주전 멤버들이 대학선발팀에 포함되며 후보들 위주로 선수를 구성해 종별대회에 나가야 했다. 

 

그렇게 대회에 출전했는데 골키퍼였던 이광칠 선배가 파울로 퇴장을 당했고, 벤치를 지키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골키퍼를 보라고 했다” 코트에 나선 적도 한번 없었던 김 총장인데 골문을 지키라니,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런데 제법 잘 막았다. “당시 수비를 보던 서영석 선배와 호흡이 잘 맞았다. 한쪽을 완벽하게 맡아줘서 나는 반대편만 막으면 됐다.” (이는 최근 들어 지도자들이 지도하는 훈련방법인데 그때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는 게 놀랍다.) 그때부터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한 김 총장은 본격적인 핸드볼 선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처음으로 핸드볼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런 까닭에 아시아를 대표해 올림픽에 나설 팀을 뽑는 지역예선대회가 생겨났고 이를 대비해 1969년 국가대표팀이 꾸려지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핸드볼 역사에서 최초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이었다. 이전까지는 출전 대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대표가 꾸려질 이유가 없었다.

 

실업팀이 없던 상황에서 고교생, 대학생, 졸업 후 생업에 종사하는 전 핸드볼 선수와 사회인 등이 모여 팀이 꾸려졌다. 한 마디로 오합지졸의 모임이었다고 김 총장은 당시를 떠올렸다. 그렇게 국가대표가 구성되었지만 마땅히 훈련할 곳이 없었다. 태릉선수촌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경기장을 대여할 형편이 못 돼 서울운동장 배구장(현 동대문종합운동경기장)에서 경기를 하곤 했다. 겨우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훈련을 할 여건이 마련되었고, 충무체육관에 있는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숙박을 해결하고 체육관 앞 기사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며 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일본으로 원정을 떠나야 했는데 입고 갈 단복이 없었다. 당시에는 협회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 해 협회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결국 그나마 (직업이 있는) 여유 있는 선수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단복과 구두 등을 해결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요즘은 흔하게 바르는 왁스조차도 일본 원정을 가서 알았을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고 정보력이 부족했다.

 


 

 

태극마크는 나라가 준 명예로운 훈장, 국가대표로서 사명감 잊지 않았으면

 

그렇게 1971년 국가대표로 공식 첫 경기를 일본에서 치르게 되었다. 당시 아시아지역예선대회에는 이스라엘, 일본, 우리나라 이렇게 세 나라가 출전했다. 남자대표팀은 이스라엘과 첫 경기를 치렀는데 이것이 대표팀으로 치른 공식적인 첫 경기로 기록되고 있다. 이스라엘에 승리를 거둔 대표팀은 일본에 패하며 결국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해 뮌헨올림픽에 나가게 되었다.

 

김 총장은 당시를 떠올리면 그저 웃음밖에 안 났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뭐가 좋다고 그렇게 핸드볼에 매달렸는지. 김 총장은 1년 여를 이 한 대회에만 매진한 탓에 교직에서 면직되기도 했다. 일본 원정을 다녀오자 ‘개런티’ 명목으로 1인당 80달러의 돈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핸드볼 선수로서 받은 첫 수입이었다. “비인기 종목이다, 열악하다 말이 많지만 우리 때는 훨씬 더 열악했다. 최근 들은 소식에 의하면 연봉 1억이 넘는 선수도 있다고 하더라. 격세지감이 따로 없음을 느낀다. 우리는 실내에서 훈련도 못해 땅바닥에서 야외에서, 훈련을 해야 했다.” 그렇게 황무지나 다름없던 텃밭을 일구고 가꾸어 현재의 환경을 만들어낸 것이 그들이다. 이 분들의 희생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냈고, 이 분들이 있었기에 영광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었다.

 

최근 많은 종목에서 국가대표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요즘 국가대표로서 의미가 퇴색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김 총장은 이런 최근의 세태를 보면 누구보다 가슴이 아프다. 자신들의 희생과 헌신적인 노력이 자칫 못 산 시대의 흑역사처럼 치부될까봐서다. 그런 까닭에 후배들을 향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후배님들이 (국가대표로서) 사명감을 가져줬으면 한다. 교육자로서 40년 이상 근무하면서도 핸드볼 종목의 국가대표선수였다는 것을 항상 가슴 속에 간직한 채 살고 있다. 태극마크는 명예로운 훈장이다. 후배님들도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 총장은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교직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핸드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김 총장이 만든 핸드볼팀만도 춘천제일고, 춘천공고, 벌교중, 광주체육중학교, 광주체육고등학교 등이 있다. 광주교육대학교 총장시절에는 엘리트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팀을 창단하기도 했다. 황지정보산업고 이춘삼 감독이 당시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현재는 태극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태극회는 국가대표 출신들의 모임으로 장학금을 수여하는 등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김 총장의 핸드볼 사랑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본 인터뷰 내용은 핸드볼코리아 28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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