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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나라 최초의 핸드볼 국제심판 박천조 원로

작성자
Handballkorea
등록일
2017.09.20
조회수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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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인을 꿈꾸던 소년은 우연히 핸드볼에 입성하며 스스로 운명을 바꿨다. 제대로 된 핸드볼 규칙서 하나 없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국내 최초의 핸드볼 국제심판으로서 험난한 길을 개척해 온 박천조 원로. 국내외 핸드볼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온 그의 인생과 함께 그가 국내 핸드볼계의 부흥을 위해 후배들에게 전하는 당부는 무엇인지 들어본다.



핸드볼, 우연이 운명이 되다


늘 그렇듯 시작은 전혀 다른 곳으로부터였다. 박천조 원로는 평생을 핸드볼과 함께 해온 핸드볼계의 원로지만 어렸을 적 자신은 육상선수였다고 회고한다. 달리는 것이 무작정 좋아서 시작했고, 이대로 육상선수의 길을 가겠노라 다짐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우연히 서울에서 열린 전국소년소녀종합체육대회에서 핸드볼 경기를 관람하게 된 것이다. 작은 공을 가지고 코트 안을 종횡무진 누비는 핸드볼 경기는 꽤 인상적이었다. 나름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그 뿐, 핸드볼이 그의 운명을 바꾸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고향으로 내려가 언제나처럼 달리기에 매진하고 있던 어느 날, 체육선생님이 중고등학교핸드볼대회에 팀을 꾸려 나가자고 제안했다. 서울에서 보았던 핸드볼 경기에 내가 출전하게 되다니.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에 대회를 준비한 게 전부였지만, 우연은 그대로 운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이 바로 박천조 원로의 60여 년 핸드볼 인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박천조 원로는 심판으로서 우리나라 핸드볼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고 그것이 박 원로에게는 큰 자부심이었다. 처음 정식으로 핸드볼 심판이 된 것은 1962년. 국내에서는 여섯 번째 핸드볼심판이었고, 그렇게 교사로 핸드볼 심판으로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활약은 국내 뿐 아니라 세계로도 뻗어 나갔다. 1972년에는 국제심판 B급 자격을 획득했고, 1977년에 국제심판 정식시험에 합격하면서 비로소 국제심판이 된 것이다. 1986년 네덜란드세계선수권대회 때는 우리나라 심판으로는 최초로 국제핸드볼연맹으로부터 세계선수권대회에

초청받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심판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 출전했을 때를 꼽는다. 지금은 세계대회에 참가해 포인트를 쌓고 이를 기준으로 올림픽에 나설 최종 명단을 확정하지만, 당시에는 국제핸드볼연맹에서 예비명단을 뽑고 오디션을 통해 최종 선발했다. 박천조 원로는 당시 이문식 원로와 최종 40인에 포함되어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오디션에 참가했고 최종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서울올림픽 이후에는 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50세가 되면 은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아시아핸드볼연맹 심판위원이 되었고, 정식으로 심판위원이 된 것은 1992년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을 앞두고 아시아핸드볼연맹 총회에서 심판위원장으로 당선되었고, 국제핸드볼연맹의 심판위원으로 위촉됐다. 아시아핸드볼연맹 심판위원장 연임에 성공하며 2000년까지 8년간 활동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가 심판으로서 가장 보람 있던 때였다고 전했다. 그 후 아시아핸드볼연맹 집행부 이사로 4년 활동 후 은퇴하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힘든 고비 하나 없이 순탄하게 걸어온 것 같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 모든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기에 어려움도 많았다. “처음 핸드볼 심판이 되었을 때는 한국어로 된 규칙서 하나 없었다. 대부분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1973년 겨울 방학에 영어로 된 규칙집을 번역해 한국어판 규칙서를 직접 제작했다.” 1981년에는 국제심판 강습회가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됐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해 그곳까지 갈 항공료를 지원받을 길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를 인계해주는 조건으로 항공료를 지원받아 간신히 참가할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영어가 발목을 잡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식 영어가 전부인데, 국제대회에 나가면 심판위원과 국제심판들 앞에서 영어로 리포트를 제출하고 발표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로 밤을 새우던 그는 결국 터키에서 협심증 진단을 받고 4일간 병원신세까지 져야 했다.



모든 핸드볼인은 경쟁자 아닌 동반자


핸드볼 심판으로서 쉽지 않은 길을 개척해왔고 그만큼 많은 영광도 누려온 박천조 원로지만 최근 핸드볼 계의 흐름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는 게 그의 속마음이다. “내가 심판과 심판위원으로 있던 당시 우리나라가 국제대회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것이 진짜 스포츠외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 시기에 많은 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이룬 성과 대부분은 박 원로가 심판과 심판위원으로 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몸과 마음을 바쳐 가꿔놓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 후배가 아무도 없다. 그가 심판위원장으로 있던 시기 많은 후배들이 국제심판 자격을 취득했지만 최근 활동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급기야 2004년과 2008년 올림픽에서는 오심의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가 은퇴한 이후의 일이었고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후배심판도 없었기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최근 국내 스포츠 종목에서는 심판 판정이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핸드볼도 예외는 아니어서 결국 2017 SK핸드볼코리아리그 플레이오프에서는 외국인 심판을 초청해 경기를 치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박 원로는 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심판들로 하여금 사명감과 신념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또, 감독들에게는 심판들이 공정한 판정을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감정적 동요를 일으켜 유리한 판정을 이끌고자 하는 행동은 절대 안 된다고 당부했다. 결국 박원로가 감독과 심판에게 바라는 것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협조해 가며 핸드볼을 다시 한 번 부흥의 길로 이끌어 보자는 ‘동반자 정신’이었다.


(본 내용은 고병훈 경기력향상위원회 위원장과 박천조 원로의 대담을 재구성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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