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핸드볼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리고 있는 제9회 아시아주니어(19세 이하) 여자핸드볼선수권대회에 낯익은 얼굴이 한국 대표팀의 손과 발이 돼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핸드볼 은메달의 주역 윤태일(43)씨다.
윤씨는 대표팀 도착 첫날인 지난달 30일부터 매일 이른 새벽 공식 숙소인 카자흐스탄 호텔로 나와 통역은 물론 모든 스케줄을 일일이 챙겨주고 있다. 본업인 여행사 일은 잠시 접은 상태. 물론 대가도 없다. 조직위원회의 무성의한 대회 운영으로 통역가이드조차 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표팀은 윤씨 하나만 믿고 일정을 소화할 정도다.
윤씨는 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텅 빈 관중석을 찾아 응원에 목청을 높인다. 윤씨는 “협회로부터 한국팀이 온다는 얘길 듣고 반가운 마음에 잠을 못 이뤘다. 모두 한가족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나”라고 웃음을 지었다.
윤씨가 카자흐스탄 땅에 발을 들여놓은 건 2005년 1월 카자흐스탄 여자핸드볼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하면서였다. 한국에서 여자대표팀 코치를 맡아 지도자로 잘 나가던 윤씨가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고민도 깊었다.
40대 접어든 나이에 맨땅에서 다시 텃밭을 일궈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기 때문. 한창 크는 딸 서은(17), 다은(15)이의 교육문제도 걸림돌이었다. 다행히 동갑내기 아내 박재현씨가 흔쾌히 동의해 줘 새로운 도전에 나설 용기를 얻었다.
언어와 환경이 생소한 카자흐스탄에서 늦깎이 도전은 생각보다 고됐다. 당장 선수들이 문제였다. 윤씨는 “처음 체육관에 들어서는데 선수들이 바닥에 누워 ‘미스터 윤’이라며 손짓을 해 황당했다. 당장 한국말로 ‘감독님’으로 부르도록 했고 훈련 시작과 끝에는 고개 숙여 인사하도록 기본부터 가르쳤다”며 “이곳 협회에서 적당히 하라고 말릴 정도로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윤씨의 열정 덕에 변방에 있던 카자흐스탄 여자핸드볼은 지난해 카타르 도하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의 수확을 거둘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윤씨는 당시 감독직에 앉아 있지 못했다. 아시안게임 두 달 전 스스로 감독직을 물러났다. 윤씨는 “협회와 사소한 오해가 있었는데 카자흐스탄 출신 코치를 감독으로 기용하려는 낌새가 느껴져 먼저 그만두겠다고 했다”며 “2년 가까이 공을 들였는데 많이 아쉬웠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이방인이다. 그래도 좋은 결실을 맺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이번 대회에서 여전히 ‘감독님’으로 불린다. 관중석에 앉은 윤씨를 보고 카자흐스탄 제자들이 또렷한 한국말로 ‘감독님’을 부르며 찾아오는 것. 윤씨는 “한국팀 플레이에 모두 넘버원을 외친다. 자신들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한다”고 전했다.
윤씨는 현재 한국 A여행사의 카자흐스탄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사장님으로 바뀐 호칭이 어색하지만 나름대로 보람을 느낀다. 윤씨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말로 어떻게 표현하겠나. 하지만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당분간은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지도자에 대한 미련은 없는 걸까. 윤씨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내 마음은 항상 정신적 고향인 핸드볼을 향해 있다”며 “하지만 좋은 후배들이 지도자로 성장해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김정필 기자 fermat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