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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인 메모리] 핸드볼 금메달리스트 이미영, 사서 변신 …책으로 ‘우생순 2탄’ 쏜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9.01.19
조회수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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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울 때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옛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스포츠동아는 스토브리그 동안 팬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은퇴 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지 않아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왕년의 선수’. 그들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008년 1월 개봉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리는 영화를 통해, 여자핸드볼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알았다.

덕분에 베이징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과 기쁨의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었다.

사실, 이미 이십년 전부터 그녀들의 베갯잇은 젖어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지옥훈련의 원류는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여자핸드볼은 2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의 금자탑을 세웠다.

1992년, 여자핸드볼이 마지막 금메달을 획득할 때 대표팀의 주포는 레프트 윙 이미영(40)이었다. 이미영은 한현숙(39)과 함께 2개의 금메달을 소유한 선수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올림픽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접은 이미영은 이후 공 대신 책을 잡았다. 금메달리스트에서 도서관 사서로의 변신.

안산 성포도서관에서 이미영을 만났다. 이제는 책 속에 파묻힌 모습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불도저 사서()



이미영은 벌써 사서 경력 16년차다. 안산에서 일하는 28명의 사서직 공무원 가운데 유일하게 정사서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정사서 1급은 석사학위와 9년 이상의 실무경력이 최소자격. 능력 있는 사서의 보증서다.

처음에는 핸드볼선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사소한 문서 오자() 하나에도 편견어린 시선을 받는 것이 싫었다.

지난 해, 후배들 격려차 태릉을 방문한 것이 전파를 타면서 동료들도 금메달리스트임을 알게 됐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했기에 이제 알려져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성포도서관 김동완 관장은 “이미영씨는 자료의 선정과 구입, 도서정리, 문화 행사 기획 등 사서의 기본 업무 뿐만 아니라 다른 업무까지도 추진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이미영은 2006년 안산중앙도서관 개관 당시 10억 예산 규모의 전산시스템 정비와 건축 부문까지도 총괄했다.

“저는 답습하고 반복하는 것을 싫어해요. 항상 활동적이고 먼저 치고 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덕분에 도서관 건축까지도 욕심을 낼 수 있었죠. 사서라면 도서관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처음에는 어렵기만 했다. 새벽 1-2시까지 도면과 씨름하기 일쑤. 하지만 그녀는 불치하문()의 정신을 잘 알고 있었다.

“아랫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물며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면 말할 것도 없죠. 건축전문가들을 따라다니며 도서관의 가장 효율적인 구조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배웠죠.”

불도저 같은 근성. 이미영은 “다 핸드볼을 한 덕분”이라고 했다.

○만년후보



익산 남성여중 2학년 시절이었다. 핸드볼 선수를 뽑는다고 했다. 뭐 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운동이 좋아 핸드볼 부를 기웃거렸다.

경쟁률은 치열했다. 단거리·중장거리 달리기부터 던지기, 멀리뛰기까지. 시험 종목도 다양했다. 10명을 뽑는데 9번째까지 이미영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서려는 순간, “이!미!영!”

알고 보니, 뽑을지 말지 고민이 많았다. 운동신경은 좋은데 작은 키가 문제였다.

“한이 맺혀서 정확히 당시 키를 기억해요. 151.7cm였어요. 나머지 9명은 거의 165cm이상이었거든요. 주전 7명 안에는 당연히 못 끼었지요. 매일 (선수들 씻을) 물 온도나 맞췄죠, 뭐.”

집에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후보 선수라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었다. 어느덧 진학시즌이 됐다.

“너는 머리가 좋으니 공부를 해도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남성여고에서도 핸드볼 공을 잡을 수 있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준비하라

고등학교 첫 연습경기. 그 날도 어김없이 이미영은 벤치를 지켰다.

다른 후보와 달랐던 점은 감독 옆에서 열심히 뛰고 있었다는 점뿐. 한 번만 내보내 달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순간, 하늘이 도왔다. “주전 언니 한 명이 발목을 다쳤어요. 감독 선생님이 ‘네가 옆에서 계속 뛰어다니니까 정신사납다’며 ‘한 번 나가보라’고 하셨죠. 어찌나 떨리던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기회. 절대 패스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하프라인을 넘자마자 한 번 공을 튀기고 바로 슛을 던졌다.

“아마, 13-14m정도 됐을 거예요. 9m가 넘어가면 거의 안 들어간다고 봐야 되거든요. 그런데 상대 골키퍼가 방심을 한거죠. 순식간에 상대 허를 찌르는 플레이가 된 거예요.”

자신감이 붙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결국 양 팀 통틀어 최다득점.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준비했더니 결국 기회가 온 거죠.”

중학교 시절부터 작은 신장의 핸디캡을 만회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차고, 뜀틀과 허들을 넘었다. 장신 수비수를 염두에 두고 2m 높이의 장애물 앞에서 슛을 던졌다.

건축전문가들을 쫒아 다니며 괴롭히던 것처럼 선배들에게 “언니 폼 멋있더라, 나 좀 가르쳐 줘”라며 매달렸다.

그렇게 2년. 이미 그녀의 감각은 후보 선수의 것이 아니었다. 기적처럼 실력에 걸맞는 체격도 갖췄다.

“중3부터 고1까지 10cm가 넘게 자랐어요. 한창 뛸 때 166cm였는데 은퇴하고 2cm가 더 컸더라고요. 이제 안자라도 되는데….”

○악바리 이미영



주니어대표로 명성을 떨치던 이미영은 결국 19세에 서울올림픽대표로 선발됐다. 15명의 선수 가운데 14번째로 어린 나이였다.

“금메달을 따서 좋았지만 경기에는 거의 뛰지 못했어요. 언니들에게 큰 빚을 진 것처럼 느껴졌지요.”

서울올림픽 이후 대표팀은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오성옥(37), 임오경(39) 등 신예들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서울올림픽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할 거라고들 했어요. 어느덧 고참이 된 제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방법은 강훈련 뿐. 어느 정도로 힘들었냐고 물었더니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 말도 마요.”

태릉선수촌 최경택 체력담당지도위원은 “당시 웬만한 남자선수들도 불암산종주에서 여자핸드볼팀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 중에서도 이미영은 독하기로 소문난 선수였다.

서울시청 임오경 감독은 “주말외박을 마치고 복귀했더니 (이)미영 언니가 경기장에서 슛 연습을 하고 있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바르셀로나올림픽 정형균(현 핸드볼협회 상임부회장) 감독에 따르면 이미영은 새벽·오전·오후 운동을 마치고도 따로 야간 훈련을 했다.

당시 핸드볼대표팀의 훈련량을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미영은 세계최고의 레프트 윙이 됐다.

작은 각도만 있어도 골네트를 흔들던 그녀의 슛은 아직도 핸드볼인들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태릉선수촌에도 도서관이 있었으면….



올림픽이 끝나자, “좋을 때 그만 두라”는 어머니의 조언을 따랐다. 고등학교 시절, 밤늦게 운동장을 돌다 불 켜진 창문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부하는 친구들이 그때는 너무 부러웠어요. 나중에 꼭 책과 관련된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죠.”

실업팀 광주시청 소속기간 중 광주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한 이미영은 조선대에서 석사 학위도 받았다.

1993년, 일용직으로 도서관 일을 시작한 이미영은 틈틈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금메달리스트가 지도자나 하지, 왜 고생을 사서하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를 물었다. 결국 1년 만에 공무원시험에 합격했고, 1994년 정식사서 발령을 받았다.

첫 업무는 장애인 방문대출. 남들은 기피하는 일이라 더 보람을 느꼈다.

“저는 건강한 삶을 살았잖아요. 안타깝기도 하고,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이미영은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도 땄다. 은퇴 후의 계획도 사회복지시설을 차리는 것이다.

“퇴직의 시점에서는 인생의 모든 것이 성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식들에게도 재산이 아니라 배울 수 있는 부모의 삶을 물려주고 싶어요.”

안산 동산고등학교에 영어교사로 재직 중인 안병현씨와 1993년 결혼한 이미영은 현재 2남1녀의 어머니.

이미영에게는 한 가지 꿈이 더 있다. 태릉선수촌에도 도서관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의 운동선수는 경주마 같아요. 외길이어야만 승부가 나지요. 선수들에게도 기본적인 교양을 쌓아줬으면 좋겠어요. 요즘 체육과학도 유행이잖아요. 지도자들만 알아서는 안 되죠. 선수라면 체육과학서적도 열심히 봐야 합니다. 만약 태릉에 도서관이 생긴다면 많은 도움을 주고 싶어요.”

꿈을 꾸기에 인간이다. 어렵고, 힘들수록 그 꿈은 더 소중하다. 그래서 그녀는 공과 씨름했고, 책 속에 묻혔다.

이미영은 “한 번의 변신을 했지만 아직도 내 인생에 다양한 가능성들이 열려있다고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라고 했다.

역시, 새로운 꿈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망울은 언제나 빛나는 법이다.

안산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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