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54㎝ 공 쥐던 거칠었던 손
이젠 요리하고 집꾸미며 살죠
운동땐 엄해도 뒤에선 솜사탕
후배들이 이런 진심 알아줬으면
부지런하고 당당해야 후회없어
자서전으로 자신감 전파할래요
성공신화를 이룬 여성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누구나 혀를 내두를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지만 그 이면에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 따스함이 숨겨져 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의 실제 주인공이자, YWCA가 수여하는 ‘2009 한국 여성지도자상’ 중 ‘젊은 지도자상’ 수상자에 선정돼 오는 29일 상을 받는 임오경 감독도 마찬가지다.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까지 이를 악물고 공을 놓지 않았던 엄청난 독기로 대한민국 국민에게 또렷이 각인돼 있는 그지만 코트를 벗어나면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다. 틈나는 대로 집안 인테리어를 손보는가 하면,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했을 땐 아이처럼 마냥 기뻐한다. 매섭게 선수들을 다그치다가도 축 처진 선수들의 어깨를 보면 언니처럼 다독이는 것을 잊지 않는 임 감독. 카리스마와 감수성, 임오경의 ‘재발견’은 태생적으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엿보는 데서 시작됐다.
▶요리에 인테리어에, 악바리 임오경은 어디로?=추석을 앞둔 9월 끝자락 무렵 한국체육대에서 만난 임 감독의 손에는 음료수와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인터뷰 시간을 맞추려고 점심을 먹지 못했는데 혹시나 해서 2인분을 사왔어요.” 어서 먹으라며 환한 미소로 샌드위치를 건네고 음료수를 따주는 임 감독. ‘악바리’로 정평 난 임오경 감독과의 인터뷰이어서 내심 단단히 벼르고 다가섰건만 초반부터 기자의 마음은 하염없이 무너졌다. 악바리 정신을 집중 공략하려던 질문 목록도 자연스레 임 감독의 취미생활로 급히 수정하게 됐다.
임 감독의 지인들은 그를 ‘퍼주기의 달인’이라 부른다. 틈나면 지인들을 집에 초대해 요리를 해주며 갖가지 파티를 벌이는 게 거의 일상이 됐다. 임 감독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참 기분이 좋다”며 웃었다. 새로운 요리법 개발도 그의 빼놓을 수 없는 취미생활.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대부분의 사람은 ‘맛있구나’하고 넘기지만 전 왜 그렇게 맛있는지 너무 궁금해져요. 꼭 따라해보지만 결코 같은 음식을 만들진 않아요. 당근 대신 맛살을 넣어보기도 하고, 새롭게 음식을 만드는 게 참 재밌어요.”
그는 틈만 나면 집안 인테리어도 바꾼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색을 칠하는 걸 좋아했고, 집안 꾸미는 데에 관심이 많았어요. 건축디자인에도 관심이 있고요. 아이 방에는 레이스가 가득한 장식을 했는데 시간만 있으면 거실도 바꿔보고 싶어요. 참, 오늘 사진도 촬영하는 건가요?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확실하게 신경 쓰고 꾸미고 왔을 텐데 참 아쉽네요.” 이쯤 되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악바리’ 임오경,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일은 독하게, 생활은 여유롭게=임 감독은 ‘악바리’란 별명에 손부터 내저었다. “코트에선 최선을 다해요. 핸드볼에 있어선 누구에게도 지기 싫거든요. 하지만 코트를 벗어나면 욕심이 씻은 듯 사라져요. 감독직을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죠.” 현재 서울시청에서 핸드볼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임 감독은 ‘운동할 때는 엄하지만 뒤에선 다독여주는 스타일’이라고 자평했다. “운동할 때는 선후배도 없죠. 같이 죽고 살고 하는 거죠. 하지만 훈련이 끝나면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려고 해요. 선수들이 이런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웃으며 말하는 임 감독의 표정에서 선수들을 향한 애정이 물씬 묻어났다.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일과 가정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다’=임 감독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부터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며 국가대표팀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이후 일본 실업팀으로 진출, 선수 겸 감독으로 생활한 뒤 귀국해 서울시청에서 한국 핸드볼계의 유일한 여성 지도자로 활동 중이다. 여전히 여성을 인정하는 데 척박하기만 한 한국 사회이지만 쉼 없이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스포츠계는 그 정도가 더 심하게 마련. 임 감독의 인생 역시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일과 가정을 병립하는 게 참 힘들다. 얼마나 험난한지 잘 알기에 솔직히 후배들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인생을 걸어왔던 핸드볼. 그에게 핸드볼은 인생 그 자체였고, 결혼생활 역시 핸드볼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핸드볼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가족과 함께 지내지 못하는 날들이 참 많았어요. 가족끼리 오랜 기간 떨어져 살아야 할 때도 있으니까 서로 참 외롭기도 했습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그의 목소리에 작은 여운이 감돌았다.
일과 가정을 모두 챙기기 위해선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한다고 그는 조언했다. 임 감독은 “일을 하고 싶은 여성이라면 부지런해야 한다. 누구에게 도움을 바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일을 가정처럼, 가정을 일처럼 부지런하게 챙겨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고 당부했다.
▶여성이 핑계는 될 수 없어=귀국한 이후 서울시청팀 감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에 오른 임 감독. 하지만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그 역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기업도 마찬가지지만 체육계 역시 술자리가 참 많아요. 여자라는 이유로 빠진다고 할까 봐 악착같이 함께했죠.” 실제로 임 감독은 소주 한두 잔에도 금세 술이 오를 만큼 주당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여자니까 봐주세요’라는 말이 듣기 싫다는 임 감독. 그는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남성과 당당하게 겨루고 싶다. 불리할 때마다 여성이라는 핑계를 대는 건 절대 사절”이라고 강조했다.
▶여성에게 자신감을 전해주고파=임 감독은 요즘 내년 출간 예정인 자서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자신의 삶을 남겨 여성들에게 작은 용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핸드볼인을 떠나 이젠 체육인으로 남고 싶다는 임 감독. 작게는 체육계에, 크게는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남은 그의 목표이자 희망이다. “몸으로 부딪치는 핸드볼부터 시작해 아이를 키우고, 감독으로 생활하기까지 내 삶을 책으로 남긴다면 조금이나마 한국 여성체육계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코트의 악바리’이자 ‘요리해주는 언니’ 임오경, 이미 그의 바람은 많은 이에게 현실로 다가와 있다.
<헤럴드 경제 김상수 기자/dlcw@heraldm.com >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