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부위를 명칭으로 하는 스포츠가 둘 있다. 핸드볼과 풋볼이다. 사람이 활동하면서 손과 발을 가장 많이 쓰는 데서 알 수 있듯 이 두 종목의 역사는 무척 깊다. 그러나 세계적인 스포츠로서의 비중이나 인기는 손과 발의 차이 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 그렇다. 내년 베이징올림픽 티켓을 따내러 나선 남자축구와 여자핸드볼에 대한 관심의 크기가 두 구기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올림픽 예선을 앞둔 여자핸드볼 대표팀에 합류한 오성옥(35)을 만나러 태릉선수촌으로 가는 길에 새삼 여자핸드볼의 위상에 대한 생각에 잠겼던 것은 일종의 정신적인 빚 때문이다. 단체구기 최초의 올림픽 제패. 6회 연속 올림픽 출전에서 다섯 차례 입상. 2004년 아테네에서의 아름다운 분투. 그러나 감동은 그 때뿐이고 다시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기까지는 항상 그랬듯이 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베이징올림픽까지 357일을 남긴 지난 17일 오성옥은 만나자마자 “젊은 애들을 인터뷰해야지 저처럼 나이 든 사람을 인터뷰하면 사기저하돼요. 사기저하”라며 밝게 웃었다. 여고생이었던 지난 89년 처음 국가대표가 된 이후 네차례의 올림픽에 빠짐 없이 나섰던 그에게 태릉은 정겹고 편안한. 친정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올림픽 예선이 열리는 카자흐스탄으로의 출국(24일)에 임박해 뒤늦게 입촌한데다 이날은 비자 문제로 오후 훈련에 늦은 탓인지 운동화로 갈아신는 손놀림이 쟀다.
◇보은의 ‘오버스텝’
“아테네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도 그래서 더 열심히 뛰었고. 그런데 감독님이 딱 한번만 더 도와달라고 하셨어요. 이번에는 기간도 짧으니까 하기로 했죠.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대표팀에 합류한 만큼 그가 다섯번째 올림픽 무대를 밟을 것으로 생각했던 터라 ‘기간도 짧으니까’라는 말은 의외였다. 예선에만 나서겠다는 뜻이 아닌가. 대표팀 임영철 감독은 “티켓을 따내고 난 뒤에 생각할 문제지만 당연히 그렇게 갈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오성옥의 생각은 달랐다. “내년에도 할 지는 모르겠어요. 나이가 있다보니 체력이 옛날같지 않아요. 애도 커가고. 후배들이 잘해주는데 굳이 제가 뛸 필요는 없잖아요. 남편이랑 다른 가족들과 상의해봐야죠. 명예도 중요하지만 가족이 먼저예요.” 실업팀 종근당 시절부터의 스승인 임 감독의 부탁과 자신을 세계적인 선수로 만들어준 핸드볼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다시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러나 핸드볼에서 볼을 갖고 네걸음 이상 옮길 수 없는 것처럼 더 이상의 올림픽 출전은 그에게 ‘룰’을 벗어난 일인 듯했다.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강도 높은 훈련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활약 중인 오스트리아 클럽 히포방크의 ‘알아서 하는’ 분위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좀 창피해요. 애들은 체력이 좋아 잘 뛰는데 언니가 돼가지고 따라가지 못하면 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좋은 점도 있어요. 이 나이 먹어서도 젊은 애들과 함께 뛸 수 있다는 것.”
모순같지만 선수생활을 오래 할 수 있는 힘은 오래 해왔다는 그 자체에서 나온다. “어릴 때는 시키는대로 하고. 힘들면 참고. 참을 수 없으면 울고 그랬어요. 그런데 운동을 오래 하다보니 제 몸을 제가 잘 알게됐어요. 하체가 좀 약하다고 느끼면 보강하고. 슛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슛 연습하고. 한 곳에 집중적으로 신경을 쓰니까 큰 문제가 안생겨요. 그리고 학교 다닐 때부터 좋은 지도자에게 기본을 잘 배워서 이날 이때까지 할 수 있는 거죠. 제가 부족한 부분을 선생님들이 채워준 덕에 어떤 상황을 맞아도 적응할 수 있었어요. 한국 선생님들이 정말 대단해요. 유럽에서는 어찌나 못가르치는지 답답할 때가 많아요.”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임순례 감독이 여자핸드볼을 소재로 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들고 있다. 아테네올림픽 결승전에서 덴마크를 상대로 두차례의 연장과 승부던지기 끝에 눈물의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바로 그 순간의 이야기다. 3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때가 오성옥에게도 네차례의 올림픽 가운데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아닐까. “아니에요.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이에요. 금메달을 땄잖아요. 금메달은 정말 하늘이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애틀랜타에서도. 아테네에서도 은메달이었던 건 하늘이 그렇게 정해놓은 것같아요.” 사실 바르셀로나올림픽은 그에게 뿐 아니라 한국 여자핸드볼에도 최고의 순간이었다. 88년 서울에서의 금메달은 홈에서 따냈다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무살 대학생이었던 그가 느꼈을 감격을 짐작할 수 있다. 한개의 금메달과 두개의 은메달을 따낸 올림픽 외에도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과 9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국제대회 입상에 따른 연금점수가 그의 말마따나 ‘만땅’이다.
그는 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마치고 이듬해 김주성씨와 결혼하면서 코트를 떠났다. 그 때만 해도 또 핸드볼을 하게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편이 힘드니까 하지말라고 했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때는 결혼하면 운동할 수 없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해서 견딜 수 없는 거예요. 하마터면 우울증에 걸릴 뻔했어요. 그래서 다시 시작했죠.” 일본에 진출해있던 선배 임오경이 그를 불렀다. 아이를 키워주겠다는 어머니 이제순씨의 말에 무작정 히로시마로 향했고 결국 지금까지 선수생활을 계속하게 됐다. 지난해 히포방크와 1년간 계약한 그는 유럽무대에서도 여전히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올해까지만 하고 은퇴하려고 했지만 클럽에서 2년 재계약을 요청해 받아들였다.
핸드볼은 남녀 모두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적지 않다.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국내에서 뛸 팀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제대회에서의 경쟁력 만큼 인기가 있고 팀도 많다면 굳이 가족과 떨어져 외국에서 운동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일본은 몰라도 유럽은 꼭 가보고 싶었어요. 핸드볼 본고장은 유럽이잖아요. 그곳에서는 어떻게 운동하나 궁금했고 한번쯤은 유럽에서 해보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아들. 남편. 그리고 어머니
아들이 많이 컸겠다는 말에 갑자기 ‘승구 엄마’의 눈이 반짝거리고 목소리에도 활기가 넘쳤다.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고. 엄마와 함께 지내게된 뒤에도 일본이며 오스트리아로 옮겨다녀야 했던 아들은 그가 코트를 휘젓고 있는 동안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열살 소년으로 성장했다. 일본에서는 일본 유치원에 다니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를 생각해 국제학교로 옮겼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미국계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다. “독일어로 수업하는 학교에 보내고도 싶지만 좀 있으면 들어와야 하니까요. 사람들은 부러워해요. 하지만 승구를 보면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일본어 영어 한다지만 외국어도 한국말도 다 완벽하지 않고 친구도 없고. 아이에게 줘야할 것이 많은데 줄 수 없어 안타깝고 미안해요. 어렸을 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쫓아다니더니 요즘은 달라졌어요. 체육관에 관중이 많으니까 엄마가 유명한 선수구나 생각하게 됐나봐요. 운동 잘하고 오라고 격려도 해주고 자기도 운동하고 싶다고도 하는데 그것만은 절대 반대죠.”
두 살 위인 남편에게도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뿐이다. 운동하는 아내를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뒷바라지에 나선 남편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선수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선수들의 은퇴후 목표는 지도자다. 오성옥도 그런 꿈을 갖고 있었다. “전에는 제가 가진 기량을 애들에게 나눠주고 싶었어요. 길게는 말고 2년 정도. 선수로선 해볼 거 다해봤으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선수생활을 하다보니 그런 생각이 없어졌어요. 지친 거죠. 그만두게되면 다 제쳐두고 쉬면서 운동 때문에 하지 못한 일을 할 거예요.” 운동 때문에 하지 못한 일은 물론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엄마가 칠순이신데 그동안 너무 오래 떨어져 지냈어요. 일본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작년부터 많이 약해지신 모습을 보니까 가슴이 뭉클하고 마음이 아파요. 어서 한국에 돌아와 같이 다니면서 즐겁게 지내고 싶어요.”
<스포츠서울 최정식전문기자 bukra@sportsseoul.com 사진 | 성복현전문기자 hsung@sportsseoul.com>